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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금 보이고 경험하는 어떤 모습에는, 과거 언제로부터 무엇과의 연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.

질병과 현상과 관계 등 수 많은 모습은 각각 그 이면에 있는 존재들이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함께 지속한 모습이 있습니다. 그렇다고 너무 과거에 연연하거나 너무 터무니 없이 먼 과거로부터라는 언급에는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. 물론 근래에 시작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만, 그 각각의 모습에는 알맞은 시간의 길이에 해당하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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몇 십, 몇 백 년 정도 살았을까요, 그런 오랜 세월 자라던 커다란 세 그루 친구 나무 가운데, 한 상처 입은 나무가 근래 태풍 바람에 쓰러졌습니다. 나무 아래 몸체에 문제가 있어 무언가로 메꾸어 놓은지 오래된 나무였는데…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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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난 겨울

 

파사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랜만의 태풍이었습니다. 올 봄과 여름에 다른 나무에 비해, 유난이 나뭇잎을 풍성히 내던 그 나무, 다른 나무는 많지 않은 나뭇잎을 내며 시들 시들 하더니 괜찮은데, 그 상처 입은 나무는 그래서 무감각 했는지, 어쩌면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을 예비 했나 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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언제부터인가 보도가 난 길 옆의 커다란 그 나무는 그렇게 힘들고 상처로 그간 힘들었을 텐데, 이렇게 자신의 생을 보냄에 슬픔의 아쉬움을 보냅니다. 사람은 물론이고, 삶에는 수 많은 생물들이 나름의 생을 보내는데, 그런 커다란 나무이기에 좀 더 관심이 머무는 것 같습니다.

자신을 그토록 푸르게 피우지 않았으면 좀 더 생을 지속할 수 있었을는지는 모름에도, 결국 그 나무는 그렇게 생을 접고 있습니다. 어쩌면 오랜 고통의 삶을 지속했을 가운데, 그 선택을 존중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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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람이 관찰하는 많은 자료와 현상의 이면에는 그렇게 저 너머의 배경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. 아마도 그런 모습이 지혜와 지식과 애착이 되기도 하며 관계로 삶이 되는 것 같습니다. 그럼에도 너무 그런 배경에 함몰되면 모든 것에 과도한 민감과 애착심을 지니게 되어 소심하고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힘든 모습이 됩니다.

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태초와 자연과 사람의 지으심과 및 이후의 수 많은 얘기와 그 배경이 있을 것임에도, 간략한 내용으로 주심으로 그 모두를 가늠하게 하십니다. 그렇다고 존재하는 모든 모습을 언제나 냉철하고 무감각하게 다루라고 하심은 아닐 것입니다.

존재하는 모습에는 그에 맞는 이면이 있음을 삶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. 지은바 된 생명체인 사람으로서 때로는 그런 존재하는 모습의 감흥에 젖음은 사람에게 주신 감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.

삶에 등장하는 수 많은 역할 가운데, 주요 등장 모습과 함께 두드러지지 않은 여러 생물의 어떤 훼손에도 이번 기회에 위로를 보내봅니다.

누군가 일찍이 그 나무에 올라 잎새들을 떨구어주었으면... , 아니 나무가 원함이 아닌 것인가... , 이는 내 마음을 위한 것인지 그 존재를 위한 것인지...

아마도 그 나무가 쓰러짐에 누구보다 슬퍼함은, 커다란 동료 나무와 주변의 나무와 함께하던 풀들과 곤충과 새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.

 

감사합니다.

Sep 2019